특별강의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전)

2421

2011-02-06 19:55:30
관리자
하나님나라를 향하여(5강)-이웃이 되라
강의 듣기


▶ 2010.7.3(세번째 고침) / 2011.1.(네번째 고침)




제5과 무엇을 할 것인가(1) 누가 10:25-37.

1. 들어가는 말 / 10:25-28
1.1. 먼저 10:25-28을 마태22:34-40; 마가12:28-34과 함께 보자.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찾아보라.

[설명] 문자숭배를 넘어서자  
  ① 율법사의 물음 / ‘율법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마태/마가) ‘내가 무엇을 실천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누가). 둘은 같은 뜻이다. 곧,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생명을 위한 물음이다.
  ② 율법사가 묻는 자세 /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마태,누가), ‘진지하고 겸손한 자세로’(마가). 복음서는 대부분 예수님과 종교지배자들이 적대관계임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마가의 상황은 매우 예외적이다.
  ③ 예수님의 대답 / 예수께서 직접 대답하신다(마태), 예수님이 되묻고 율법사가 그것에 대해 대답한다(누가), 예수께서 직접 대답하시고 율법사가 그에 덧붙여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마태 누가와 달리 율법사가 예수님에게서 칭찬을 받는다(마가).  

1.2. 가장 큰 계명(생명을 얻는 길)은 사랑이다. ‘너나없이 사랑을 말하는 시대에서’ 기독교사랑은 과연 무엇일까?

[설명] 하나님나라의 사랑에 대해서

1.3. 우리는 하나님을 (     ) 사랑하고, 이웃을 (    ) 사랑하는 것이다.
  =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신6:5; 11:13을 보라.
  = 우리는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레위기19:18도 보라

  [설명] 여기서 요점만 정리하자. 두 관계와 그리고 하나님 우선이라는 사실을! 온 존재를 기울여 사랑하라! 여기에 더 붙일 말이 있을까? “여러 가지 방언으로 갈라진 인류 가족의 단일 언어는 종교다. 그리고 종교는 축복과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동시에 이미 그 이름이 알려진 것을 초월하려는 시도이다. 종교의 언어들 - 곧 ‘하나님, 천사, 기적, 구원, 부활’ 등 - 은 우리에게 개인의 현상유지를 넘어서도록 촉구한다. 우리가 그 행복(축복)에 도취되지 않도록... 그래서 나는 종교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내게 나의 행복을 일상성을 넘어서 표현하도록 하기 때문이다”(죌레,1987:213). 이처럼 우리도 <사랑>이란 우리시대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하나님나라의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1.4. “둘째는 이와 같다”는 말을 보라.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설명] 둘은 결코 분리할 수 없다. 가장 큰 계명은 일부 유대인들의 신학처럼 고도의 추상성으로 가득한 하나님사랑이 아니라, 이웃사랑과 함께하는 하나님 사랑이다. 이웃관계를 무시한 하나님사랑을 결코 없다. (주의! 이 말이 ‘하나님과 인간이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선택해야 한다)
  
1.5.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2중 관계,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identity)이다.

[설명] “정체란 자신에 대한 중심적인 시각과 방향 및 살아있는 전체성이며”(에릭슨), “자기 자신에 대한 일관성있는 의식과 자신의 삶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이다”(휠리스). 하나님나라 안에서는,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만나며, 하늘의 일과 땅의 일이, 교회와 세상이 함께 만난다. 「하나님의 사랑」(은혜)로 새로워진 우리(마태20:1-16, 제2과)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두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존재다. 사실 이것은 둘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현실 - ‘그것과 같으니’(마태22:38) - 이다.
  
1.6. “전존재를 기울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 이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본뜻이 달려있다(마태). 당신은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이 말씀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가?

[설명] “무신론적 경향을 가진 사람들은 ‘인간을 향한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과 분리시키려 한다. 하지만, “기독교적 삶이란 ‘하나님의 은혜의 크신 풍성’(엡2:7)에 대한 감사다. 감사란 삶을 주신 분을 향하는 것, - 단순한 우정이나 지향이 아니라 - 곧 「삶의 수행」이다.  이것은 「삶을 주신 분」과 같은 사랑 가운데서 가는 길이며, 그분의 관심인 하나님나라 역사에 참여한다”(골비쳐)

1.7. 가장 큰 계명,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기억하자(마태22:40). 로마13:8-18도

[설명] 모든 말씀은 이 두 가지 사실에 강령이다(걸려 있다)(hang on /NRSV).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나>, <나-이웃>이란 두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은혜)으로 인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한 이웃을 사랑한다. 하나님나라는 거저 주시는 선물이며 순종의 요청이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창세4:9)는 주님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으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안에 살지 않고 그리스도와 이웃 가운데서 산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루터)  “사랑의 이중계명은 하나님나라의 헌법이다”(크라우스)

2. 10:29-37 비유 - 물음과 대답  
2.1. 먼저 이 비유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을 살펴보자. 다음과 같은 어거스틴의 설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오늘 우리 시대는...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 - 아담 / 예루살렘 - 하늘의 도성 / 강도들 - 악마와 그 천사들 / 선한 사마리아인 - 그리스도 / 상처를 싸매 주는 것 - 죄의 억제 / 기름과 포도주 - 위로와 권면 / 짐승 - 그리스도의 몸 / 주막 - 교회 / 두 데나리온 - 사랑의 두계명 / 주막 주인 - 사도 바울 / 사마리아사람이 돌아옴 - 그리스도의 부활>...

[설명] 비유해석의 기본원리(1과)를 다시 기억하자. “비유를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것은 대답할 가치조차 없는 바보 짓거리다”(칼뱅)

2.2. 율법사는 묻는다 -  “그렇다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그가 이렇게 묻는 동기(까닭)는 무엇일까? 그들의 신학체계는 「이웃」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태5:46)도 보라.  

[설명] 유대율법주의자들에게 이웃이란 동족만을 뜻한다. 이방인 사마리아인은 제외된다. 나아가 동족 중에서도 세리와 죄인들은 이웃이 아니다. 이처럼 그들에게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은 있지만 ‘사랑할 이웃’은 매우 적다. (정결법 등 따지고 들어가면 더욱..)

2.3. 비유의 상황 /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25 킬로미터 떨어진 내리막길로 험하고 강도가 자주 나왔다. 여리고는 당시 제사장들의 거주지였다. 이 사람은 강도 만나서 쓰러져 ‘거의 죽게 되어 버려져’ 있다. 먼저 제사장이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피해 지나갔다. 하필 제사장을 등장시킨 예수님의 의도를 생각하면서 대답하자.

[설명1] ① 제사장과 레위인은 제사집행에서 한 짝을 이루었기에, 이 비유는 두 사람이 지금 제사를 집행하고 집으로 가는 길(적어도 제사집행과 관계있는 그 어떤 일)을 연상하게 한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 봉사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약 이만 명이었다. 성전에서는 날마다 아침과 오후에 두 차례 정기적인 제사가 있었다. 각 조마다 제사장들이 수백 명에 이르렀고 그 가운데 제비를 뽑아 당첨된 사람들이 - 대부분은 그냥 참관만 했다 - 몇 분야로 나누어져 제사를 집행했다. 제사장이 제사를 집행하러 가는(또는 그 일을 끝내고) 가는 길이라면, 시체나 피를 만져서는 안 된다. 가까운 친척의 시체를 제외하고는 모든 시체와 접촉을 금했다(레위21:1-4). (대제사장은 어떤 시체든지 접촉해서는 안 된다(레위21:10-11).

[설명2] 그러나 이 같은 논리(자기합리화) 뒤에는 물질적 이해관계도 자리 잡고 있다. 제사장들은 제사집행으로 십일조를 받아, 몫을 나누어 생활비로 받았다. 그가 지금 정결법을 어긴다면 자기에게 돌아올 십일조의 몫이 사라진다. 특히 십일조의 하나인 「요제」(wave offering)는 제사장과 그 가족들의 몫이었는데, 이것은 정결법을 잘 지킨 제사장들에게만 돌아간다. 「성문법」에는 시체와 가까이 하는 일을, 「구두법」에는 이방인과 만나는 일을 그 첫째 금기사항으로 들고 있다(베일리).

2.4. 제사장의 행위가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제사장은 그 사람을 피해가며 말한다 ‘나는 하나님의 율법에 충실했다’

[설명] “사람은 양심에 따라 악을 행할 때, 가장 마음껏 그리고 가장 즐거이 행한다”(팡세:813항).

2.5. 레위인도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피해 지나갔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에게도 제사장과 같은 변명이 가능할까? 그렇지 않다면 그는 어떻게 자신의 행동을 변명할 것 같은가?

[설명] 레위인은 당시 제사장의 보조역으로 제사 때 제물을 준비하고 노래(찬양)를 부르고 십일조를 거둬들이고 성전경비를 섰다. 그들의 역할은 철저히 제사장의 삶(행동)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지금 그가 제사장의 뒤를 따라 간 것으로 보아 그 제사장과 같이 제사를 집행에서 돌아가는 길이었으리라. 그는 제사장이 자기보다 앞서 그 길을 지나간 것을 안다.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못 본체 하고 지나간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레위인에게는 제사장처럼 정결법을 지키라는 명령은 없다. 이 사람을 돕는 일에서, 제사장과 달리 ‘율법에 비추어서’ 아무 거리낄 것이 없다. 차라리 율법은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한다(레위19:18). 소나 나귀가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체 하지 말고 일으키라(신명22:4)는 말씀이 있다면, 하물며 죽어가는 사람이랴! 하지만 그는 피하여 지나갔다. 그것도 제사장보다는 더 무정하게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고’(32) 그냥 지나갔다.
   이제 그가 이런 행동을 하면서 할 수 있는 변명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앞선 분을 따른다!”라는 말이리라. 곧, ‘앞서 간 제사장께서 아무 일(도움)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면 단지 레위인에 지나지 않는 내가 이 귀찮고 위험한 일에 애쓸 까닭이 있겠는가?’ 그는 지금까지 늘 그러해왔듯이 이런 논리로 자신의 무정함을 감추고 비굴을 덮으려 한다.  

2.6.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4:17). 마땅히 해야 할 일 앞에서 레위인의 변명은 우리의 것은 아닌가?

[설명] “사랑의 상실, 대상에 대한 무관심, 그 권태야말로 모든 우리들의 무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김지하 시집 「황토」 후기)

2.7.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사람을 보라.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적대관계(누가9:51-56; 요한4:9등), 그렇다면 사마리아인에게는 어떤 변명이 가능할까? 그가 강도만난 이 사람(유대인)을 버리고 간다고 해서, 어느 누가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설명]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적대적 골은 크고 깊었다. 솔로몬 이후 예루살렘(남 유다)과 사마리아(북 이스라엘)의 분열왕국. 그리고 사마리아(이스라엘)는 앗수르에(주전722년), 예루살렘(유다)는 바벨론에(주전586년)에 멸망당한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예루살렘 세력은, 자신을 거룩한 백성으로 여기며 앗수르의 유형정책으로 혼혈화된 사마리아를 멸시했고 사마리아는 이에 맞서 싸워왔다. 특히 주후 6-9년 유월절 어느 밤중에 차별과 멸시로 인해 분노한 사마리아인들이 사람의 뼈를 예루살렘성전에 뿌렸다. 이 사건 이후 그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들은 서로 같이 먹지 않았고(요한4:9), 증오심에 가득 차 있었다(누가9:51-56).

2.8. 청중들은 이제 등장할 사람으로 당연히 예루살렘의 한 평신도를 상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예수님의 이야기를 보라. 그분은 의도적으로 사마리아사람을 등장시킨다. 그것도 그를 ‘선한 인물’로 묘사하면서. 유대인들이 볼 때 사마리아사람과 ‘선하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선한’ 사람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민족적(종교적) 우월감에 빠져있던 유대인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제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보라. 제사장과 레위인의 행동과 견주어서.
   = 그를 보자 (무정하지 않고) 불쌍히 여긴다.
   = (피하지 않고) 다가간다.
   = 기름과 포도주(민간요법)를 상처에 붓는다.
   = 그를 자기 짐승에 태운다.
   =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돈을 지불하고 치료한다.
   = 다시 돌아와 그를 돌볼 것을 약속한다.

[설명] 비유의 파격성을 보라. 장벽의 극복, 사랑의 철저성이다.

3. 비유의 주제 - “그대도 이와 같이 행하라”
3.1. 율법사의 물음(29)와 예수님의 되물음(36)을 서로 견주어 보자.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마치면서, 그 율법사에게 무엇을 묻고 명령하는가?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는가?
  
[설명] 율법사 -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29) : 비유에 나타난 「제사장과 레위인의 행동」이 이렇게 질문하는 그와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 살펴보자.
  
3.2. “그대가 이웃이 되라” 36절을 보라.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이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표준새) "Which of these three, do you think, proved himself a neighbour to the man who fell into the brigands' hands?"(JB). 이 말씀은 이웃사랑이 어떤 것임을 말씀하는가?

[설명]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생각(그들의 견해)을 온전히 뒤집는다. ‘누가 내 이웃인가’가 아니라,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로 바뀐 것이다. ① ‘누가 내 이웃인가’라는 물음에서 보자 - 이처럼 자신을 중심에 놓고 이웃을 하나의 대상으로 볼 때 - 제사장과 레위인 - 이런저런 변명이 가능할 것이다. ②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서 보자 - 이 때 중요한 것은 ‘강도만나 쓰러져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사람을 중심에 놓을 때, 우리의 온갖 「이웃규정과 변명」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 주님은 밝히 말씀하신다 ‘그대 자신이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라!’(JB) “우리는 아무도 이웃이 누구인지 정의할 수 없다. 다만 우리 자신이 스스로 이웃이 될 수 있을 뿐이다”(그레벤)

3.3. 비유는 당시의 지배구조를 향해 도전한다.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고 있다고 자랑하는 제사장, 레위인의 모습을 풍자한다. 사실, 사마리아사람이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을 때 (마치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할 수 있는 변명(자기 합리화)은 그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넘어섰다.  

[설명] 참된 이웃은 상처 입은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 그를 자기 이웃으로 만든 사마리아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내 이웃은 길을 가다가 만나게 되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 아니고(그래서는 우리는 누구도 만날 수 없다), 능동적으로 찾아나서야 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사랑은 가정이라는 틀 안에서, 크리스마스 때나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랑이 개인적이고 감상적인 그 무엇으로 좁혀진 상황에서 좀 더 새로운 돌파가 필요하다. 공적(公的)인 것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랑,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죌레) 이웃사랑이란 ‘벽’을 돌파하는 것이다. 그 벽을 넘는 사마리아인을 보라. 오늘 우리가 넘어야 할 벽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나는 그리스도를 찾고 있으나 그를 발견하지 못한다. 나는 나 자신을 찾고 있으나 나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이웃을 발견하고 우리 세 사람이 함께 우리의 길을 걷는다”(유럽 어느 항구의 벽)

3.4.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잠언24:10-12). 이 말씀을 제사장과 레위인을 생각하며 살펴보자

[설명] 문맥에서 <환난 날에 낙담한다>는 것은, 이웃의 고통을 보고 외면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기억하자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고난당하는 자를 보고서 움츠려들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이는 것이다”(10). 곧, 하나님의 사람은 미약한 자가 아니다. 우리는 능력의 사람이다.

♣ 부록 :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4.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28)
4.1. 영생을 얻는 길은 이웃사랑에 있다. 이웃사랑이 곧 생명의 삶이다. 다음 이야기를 읽고 이야기해보자.
<옛날 시각장애인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언제나 캄캄한 밤길을 떠나게 되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에는 초롱불을 켜들고 다니곤 했다. 어느 한 번은 한 사람이 마주 오다가 그를 보고 호기심이 나서 물었다. 여보시오, 당신의 그 지팡이는 길을 더듬어 가는데 큰 소용이 되겠지만, 구태여 이 초롱불은 왜 켜들고 다니는 것입니까? 그래 당신은 공연히 기름만 허비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그 말에 맹인은 이렇게 대꾸했다. “물론 이 초롱불은 기실 나에게 필요해서 켜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지요. 이 초롱불은 바로 당신같이 길을 마주 오는 사람들을 위해 장만한 것이지요. 내가 초롱불을 들어야 마주 오는 사람들이 부딪치지 않을 게 아닙니까!”>(우리나라 전래이야기)

[설명] 이웃과의 나눔(연대성)이 없는 신앙은 하나님나라 백성이 아니다. “내가 주고받는 것을 그만둔다면 나는 하나의 돌이 될 것이다.  한 그루의나무가 꽃을 피우듯 내가 빛난다면 나는 주는 것과 받는 것의 한가운데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죌레,1980:97). 그리고 그 일이 바로 하나님나라가 지금 임한 것이다. 그 사랑의 삶이 내게 생명을 준다.
  
4.2. <불쌍히 여김에서 ...... 다시 올 것을 약속함> 까지.... 사마리아사람의 행동을 다시 살펴 ‘이웃사랑의 철저성’에 대해 얘기해 보자. 엡3:18-19도 보라

  [설명] “우리가 긍지 높은 반역아라면, 사랑이 박리다매되는 이 징그러운 시대에 우리의  사랑을 호락호락 입에 올리지 말자꾸나. 사랑이 가슴 속에서 자꾸만 자라고 또 무럭무럭 자라서 클 대로 크고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으면서 이 작은 가슴에 꽉 들어차 버려서 가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아 이제 더 이상 가두어 놓을 수 없게 된 마지막 순간, 바로 그 순간에 깊은 한숨과 더불어 토해내는 고백인 사랑, 나는 그 한 마디의 사랑만을 원한다”(서준식). 오늘 우리의 사랑이 너무 가볍고 쉬운 것만을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4.3. 오늘 우리가 힘써야 할 이웃사랑의 영역(1). - 이웃사랑의 가치에 대한 담화의 생산과 확산
  
  [설명] ① ‘이웃사랑은 하나님사랑 만큼 귀한 것이다!’ - 하나님나라 길에서 이웃사랑을 선택사항으로 생각하는 이들을 보며. ②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자기 자신을 살리는  길이다!’ - 이웃사랑을 하면서, ‘이것은 남을 위한 것이다!’라고만 생각하고 있다. ③ ‘우리의 이웃개념은 보다 넓히자’ -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너무 좁진 않는가? ④ ‘이웃사랑은 그 자체가 행복이다’ - 이웃사랑을 어렵고 힘든  짐처럼 여겨지고 있다.

4.4. 오늘 우리가 힘써야 할 이웃사랑의 영역(2). -이웃사랑에 대한 지혜, 경험과 실천을 통한 방법(know-how)의 개발.

  [설명]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실천에서 「전도, 교회봉사, 해외선교」에 대한 기술(지혜)은 많다. 하지만 이웃사랑(세상에서 선을 행하는 일) 방법은 너무나 부족하고 적다. 그래서 때로는 「온정주의」에 머무르거나, 어떤 문제(벽)가 나타날 때는 당황해 한다.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They are skilled in doing evil; they know not how to do good./NIV)"(렘4:22). 모든 사람을 똑같은 방법으로 사랑할 것은 아니다.예수님을 보라. 어떤 이들에게는 한없는 자비로 어떤 이들에게는 강렬한 비판으로! 이에 대해 토론하여 영역과 방법을 확대해야 한다.

4.5. 오늘 우리가 힘써야 할 이웃사랑의 영역(3). - 이웃사랑은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도 드러나야 한다.
   “사랑은 곤궁에 대해서 뿐 아니라 정의와 자유를 위해서도 싸운다. 우리는 길가에 쓰러진 모든 사람을 위해 선한 사마리아사람이 되도록 부름 받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길을 가는 동안 더 이상 얻어맞고 약탈당하지 않도록 여리고로 가는 모든 길을 새롭게 건설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언젠가 깨달아야 한다”(마틴 루터 킹)

  [설명] 성경은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동시에 (특히 예언서)은 이웃사랑이 사회적 과제임을 강조한다.  “네가 새 집을 지을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신22:8)
  나악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교묘한 접근에 대한 비판적 성찰.  “강대국들의 신자유주의 처방 - 시장개방 자본자유화 민영화 프로그램 등 -을 q보라. 겉으로는 작은 나라들을 도와주는 것처럼 말하나, 사실은 강대국(그 나라의 기업들)의 이익을 위해서다. 그들은 강도만난 사람을 더 고통스럽게 한다.(장하준 <나쁜 사마리아인들>)

4.6.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로마13:8). 사랑의 빚을 지게 하자. 사랑은 불멸의 부채다.


♣ 부록 /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1. 1994년에 제정된 이 법은 <선한 사마리아인법>이라고도 부르는데, 자신에게 피해가 없는데도, <구호행위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사람을 처벌하는 법>이다. 제사장 레위인처럼 도와야하는 상황에서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이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을 위반하는 게 된다. ▶ 우리나라 법에는 처벌규정이 명시되진 않았지만 ...  "위험에 처해있는 사람을 구조해 주어도 자기가 위험에 빠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의로 구조하지 않는 자는3개월 이상 5년 이하의 징역, 혹은 360 프랑 이상 15,000 프랑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프랑스형법 제63조) "도움이 필수적으로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사고나 공공의 위험 혹은 위기에 처해 있는 자에게 도움을 주지 않은 자는 징역 1년 이하 또는 벌금형에 처한다"(독일형법 제330조 C항).  일본도 구조의무가 있는 자가 구조를 유기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 구조의무가 없는 자가 유기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게 하고 있다.
▶ 하지만, 이것을 법으로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① ‘자신에게 위험한 상황이 아닌데도’ 란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명하기가 어렵다 ② 사실 자기에게 위험하지 않는(손해가 되지 않는) 사랑이 어디 있을까? ③ 인간의 선행을 법률로 규정한다는 것은 무리다.
2. 우리나라의 <응급의료법>이 2008년 6월 개정되었다. 개정이유는 이 법이 일반인의 적극적인 구호행위를 장려하기 위한 법이라면, 그 동안 그 구호과정에서 선한 의도로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돕다가 본의 아니게 과실을 낸 경우, 그 과실에 대한 민ㆍ형사상 책임을 져야하는  문제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긴급한 응급조치가 제때 이뤄졌다면 예방이 가능했을 응급환자의 사망률은 39%로 선진국보다 4배나 높았다. 개정안은 그동안 의료인 외에 일반인에게는 사실상 금지된 응급조치를 누구든 할 수 있도록 확대했으며,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과실에 대해 면제(또는 정상참작)해주는 것이다.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 5조의 2>
[선의의 응급의료에 대한 면책] 생명이 위급한 응급환자에게 <응급의료종사자>가 아닌 사람이 응급의료 또는 응급처치를 제공하다가 발생한, 재산상 손해와 사상(死傷)에 대하여,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없는 경우 해당 행위자는 민사 책임과 상해에 대한 형사 책임을 지지 아니하고 사망에 대한 형사 책임은 감면한다.
<시행령 제63조> (응급처치 및 의료행위에 대한 형의 감면) 응급의료종사자(또는 응급처치 제공의무를 가진 자)가 응급환자에게 발생된 생명의 위험, 심신상의 중대한 위해 또는 증상의 악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긴급히 제공하는 응급의료로 인하여 응급환자가 사상(死傷)에 이른 경우 응급의료행위가 불가피하고 응급의료행위자에게 중대한 과실이 없는 때 정상을 참작하여 「형법」 제268조의 형을 감경하거나 면제할 수 있다. : 면책범위에 <응급의료 종사자> 뿐 아니라 <응급처치 제공의무를 가진 자>도 추가했다. 법조항의 제목도 (의료행위에 대한 형의 감면)에서 (응급처치 및 의료행위에 대한 형의 감면)으로 개정되었다.
3. 어떠한 선행에도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기억하자. 법률로 선행을 이야기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나, 선행을 가로막지 않고 장려하려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다.  그런 뜻에서 오늘 교회는 선행을 장려하는 일을 힘써야 할 것이다. 제도적 장치, 담화의 생산과 확대....


* 정경선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1-02-12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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