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노니아
평화 나눔터

1611

2006-07-28 19:50:07
한성국
도정일- "도서관 없는 나라"



작가 박완서 선생의 어린 시절이 소재가 된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는 작중 주인공 소녀 완서가 난생처음 식민지 시대 서울의 공공도서관을 찾아갔던 이야기가 나온다. ‘국민학교’ 시절 어느날, 소녀 완서는 국어책에 나오는 도서관 찾아가기를 실행키로 하고 짝꿍 복순이와 함께 경성 공립도서관(지금의 롯데백화점 자리)과 경성 부립도서관(지금의 조선호텔 건너편)을 차례로 돌다가 간신히 어린이 열람실로 안내된다. 그날 완서가 빌려 읽은 책은 <레 미제라블>을 아동용으로 고쳐 쓴 <아아, 무정>인데, 꽤 두터운 책이어서 완서는 도서관 문닫을 시간까지 다 읽지 못한다. 대출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녀는 못 다 읽은 책을 그냥 두고 오는 수밖에 없다. 그때의 심정을 작가는 소설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내 혼을 거기다 반 넘게 남겨놓고 오는 것과 같았다.”

“그날 이후 공일날마다 도서관에 가서 책 한권씩 읽는 건 내 어린 날의 찬란한 빛”이 되었다고, 지금 대작가가 된 박완서는 소설 속에서 회고한다. “매일 밤 꿈에서 왕이 되는 행복한 거지와 매일 밤 꿈에서 거지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불행한 왕 얘기도 그때 읽었고, 복순이가 먼저 읽은 소공녀도 물론 따라 읽었다. 소공녀 세라도 하녀로 전락한 뒤 어느 때부터인가 문득 밤마다 그의 귀가를 기다리는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과 훈훈한 난로를 꿈처럼 경험하게 된다. 나에게 부립도서관의 어린이 열람실은 바로 그런 꿈의 세계였다.” 이런 대목들을 읽다보면, 작가 박완서를 있게 한 기초공사는 바로 그의 어린 시절 도서관 독서경험에서 다져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나라는 공공도서관, 대학도서관, 학교도서관, 어린이 도서관 할 것 없이 전국 어디를 가봐도 누가 알까봐 겁날 정도로 도서관 수가 모자라고 콘텐츠도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 공공도서관은 돈 없는 시민도 얼마든지 정보-지식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기본 인프라이며, 이 인프라를 깔아주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다. 시민이 제돈 내고 사보지 않으면 책을 볼 수 없게 되어 있는 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중국과 대한민국뿐이다. 국민이 정보-지식에의 평등접근권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은 문화적 문제이기에 앞서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이다.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정보-지식의 중요성이 높아지는 이른바 ‘지식사회’일수록 국가는 시민의 평등한 정보접근권을 높이기 위한 기본 시설을 만들어줘야 한다. 미래사회가 어떻게 정보의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막아낼 것인가는 지금 모든 지식사회 지향국들의 과제가 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공공도서관도 턱없이 모자라지만 이렇다 할 도서관 정책조차 없는 나라이다. 지방자치단체들도 예외가 아니다. 정치인들에게도 도서관은 미미한 주변적 문제에 불과하다. 정치인, 정부, 관료 할 것 없이 정책 책임자 다수가 인터넷만 있으면 모든 정보를 공짜로, 혹은 싼값으로 얻을 수 있다는 황당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국민들도 도서관과는 워낙 인연없이 살아온 터라 지역도서관이며 어린이 도서관을 더 많이 짓고 콘텐츠를 공급하도록 요구하는 일이 국민의 당연한 권리라는 인식을 별로 갖고 있지 않다. 미국 의회는 지금부터 정확히 200년 전인 1802년 1월26일, 수도 워싱턴 중심부에 국립도서관부터 짓도록 의결하는데, 이것이 지금 세계 최대 도서관이 된 미 의회도서관이다.

박완서 소설에 나오듯이 일제 식민통치자들조차도 공립도서관과 부립도서관을 시청 바로 앞에, 말하자면 ‘도심’에 짓는다는 기본 도시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공립도서관은 해방 뒤 국립도서관으로 바뀌지만, 독립된 나라의 역대 정권들은 그 도심 도서관을 남산으로 내쫓았다가 다시 서초동 구석으로 내몬다. 도서관의 이 지리적 주변화는 우리 사회의 수준을 대변한다. 공공도서관은 이미 문화복지 차원을 넘어 정치, 경제, 사회의 기본 시설이고 이 시설은 주민들의 생활권 안에 있어야 한다. 뉴욕의 4대 공공도서관은 모두 도심에 있다. 서울은 뭘 하고 있을까? 시 당국은 ‘시립 중앙도서관’을 도심에 지어 1천만 시민의 정보중심부가 되게 해줄 정책을 세우고 실천할 때가 아닌가.

도정일/ 경희대 영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씨네21 2002.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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